루쉰 '납함', 한 선각자의 자조적 외침 苦讀과 孤獨

  루쉰의 단편소설집『납함(呐喊)』을 읽다. 시대가 개인을 향해 강권하는 온갖 비극들이 그토록 담담한 필치로 씌어질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납함’은 ‘고함’, ‘외침’을 말한다. 그의 고함에는 쉰 소리가 난다. 막혀 있어 가라앉은 목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시대의 새벽이기 때문이다. 새 시대의 여명이 산야를 적시는 순간, 수천 년 간 꿈결을 헤매던 이들 가운데 몇몇이 먼저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긴 세월동안 닫혀있던 성대를 열어 외치는 고함은 낮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외침이 잦아져 수천 년 간 걸려있던 가래가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면, 가라앉았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넓은 지역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의식을 되찾고,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보다 커지면, 그들이 누워있던 낡은 집은 흔들려 허물어지고, 새 집을 지을 새로운 역량을 지닌 젊은이들이 속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문(碑文)이나 베끼며 소일하던 루쉰이 마지못해 일어나 이 『납함(呐喊)』을 쓴 것은 처음에는 그리 영웅적인 시도가 아니었다. 약간은 반신반의의, 자조적인 시도였으며, 회의주의적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 번 내질러본 고함이었다. 그는 ‘문약(文弱)’이 세태를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문약’은 일거에 세태를 바꿀 수 없었다. 극소의 인간들을 일깨울 수 있었지만, 그들만으로는 거대한 대륙 위의 수많은 인민들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낡은 집의 안마당에는 여전히 수백 갑자의 나이를 먹은 추악한 민족성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절대다수의 인민들의 얼굴 위에 달라붙어 있다. 이들을 위해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십 수억의 아Q들은 언제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그들은 언제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아, 이러한 이상은 정녕 가당찮은 것인가?

  첫 단편소설집 앞머리에 적힌 루쉰의 글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해 본다. 

  “후에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무릇 갈채는 한 사람을 고무하여 전진케 하고, 비판은 한 사람을 부추겨 분전케 하는 법이다. 홀로 낯선 이들 가운데서 제아무리 소리를 쳐봐도, 반응이 냉담하여 그에 대한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어떠하겠는가? 끝없는 황무지에 버려진 듯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이렇듯 내가 느낀 그 감정이 고독임을 알았다.…그러나 끝 모를 비애감에 빠져서도 분노를 품지는 않았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반성케 하고, 자신을 반조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나는 결코 팔을 한 번 휘둘러 구름떼 같은 추종자들을 긁어모을만한 영웅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鲁迅全集(第1卷)』p.439~440「自序」中. 

  “그 후로 이왕 시작한 것 그만 둘 수가 없어, 소설 비스무레한 글 몇 편을 적어 친구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건넨 것이 쌓이고 쌓여 십여 편이 되었다. 나는 이미 스스로에 대해, 절박하다고 해서 입을 다무는 그러한 사람은 아니라고 여긴다. 허나 어쩌면 여전히 나 자신의 고독과 비애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터인지라, 때때로 고함을 질러, 고독감 속에서 달려 나아가는 용사들이 그들의 전진을 머뭇거리지 않게 잠시나마 위안을 주고자 할 뿐이다. 나의 고함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용맹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가증스러운 것인지 가소로운 것인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위의 책 p.441


2008. 7. 26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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