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벤야민과 푸코, 이들의 주된 문제의식은 모두 칸트라는 거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하다. 이들의 정치한 이론작업 속에서, 혹은 몇몇 선언과 아포리즘 속에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이 메아리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였던가? 어쩌면 ‘생존’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칸트의 도덕률은 너무도 순진하고 진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조차 ‘요청’이라는 겸손한 단어로 자신의 실천철학을 총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직도 누군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더 이상 우리는 진리를 논구할 것이 아니라, 푸코의 작업을 따라 진실을 탐사하고 부드럽게 드러내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존, 그 이상의 가치가 또 있단 말인가?
맑스, 벤야민의 작업은 인간가치의 말소현상 비판을 위해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도시문명화를 문제시 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구의 과열, 인간의 생존이 문제가 된다. 주위의 모든 행성을 집어 삼키는 죽어가는 거대한 늙은 별의 모습을, 우리는 이 조그마한 지구별의 모습 속에서 추측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어느 한 가지 얽히고설키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자본’, ‘시장’, ‘노동’, ‘환경’, ‘유행’, ‘전쟁’, ‘자유와 평등’, ‘교육’, ‘세계화’ 등등, 우리의 생존을 위한다면, 열거된 모든 문제들이 되짚어져야 한다. 여전히 ‘양’이 문제라고 믿는 그 믿음들이 문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21세기에도, 지난 세기의 ‘계측적’이고 ‘통계학적’인 ‘진리’ 담론들이 지양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우리 인류는 금세기에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공포영화에 ‘출연’하게 될 것이며, 틀림없이 22세기의 목전에서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다.
2008. 7. 7
粗髥散筆.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였던가? 어쩌면 ‘생존’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칸트의 도덕률은 너무도 순진하고 진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조차 ‘요청’이라는 겸손한 단어로 자신의 실천철학을 총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직도 누군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더 이상 우리는 진리를 논구할 것이 아니라, 푸코의 작업을 따라 진실을 탐사하고 부드럽게 드러내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존, 그 이상의 가치가 또 있단 말인가?
맑스, 벤야민의 작업은 인간가치의 말소현상 비판을 위해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도시문명화를 문제시 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구의 과열, 인간의 생존이 문제가 된다. 주위의 모든 행성을 집어 삼키는 죽어가는 거대한 늙은 별의 모습을, 우리는 이 조그마한 지구별의 모습 속에서 추측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어느 한 가지 얽히고설키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자본’, ‘시장’, ‘노동’, ‘환경’, ‘유행’, ‘전쟁’, ‘자유와 평등’, ‘교육’, ‘세계화’ 등등, 우리의 생존을 위한다면, 열거된 모든 문제들이 되짚어져야 한다. 여전히 ‘양’이 문제라고 믿는 그 믿음들이 문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21세기에도, 지난 세기의 ‘계측적’이고 ‘통계학적’인 ‘진리’ 담론들이 지양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우리 인류는 금세기에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공포영화에 ‘출연’하게 될 것이며, 틀림없이 22세기의 목전에서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다.
2008. 7. 7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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