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동문선, 1998)의 첫 번째 강의 부분을 간만에 다시 읽다. 그의 계보학적 방법론의 의의와 과학과 권력에 대한 서설적(序說的) 성격의 글이 실려 있었다. “우리가 추적해야 할…그 궤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아무런 목표 지점이 없다는 것, 또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p.20
“내가 여러분들에게 제시했던 작업은 단편적이고 반복적이며, 동시에 불연속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열병환자의 무기력증’이라는 말과 아주 잘 어울리는 상황이다. 이 증세는 도서관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자료나 참조서, 먼지 낀 글들, 또는 한 번도 읽히지 않은 텍스트들, 그리고 인쇄되자마자 사장되어 서가에서 잠을 자다가 수세기 뒤에나 선반에서 끌어내려지는 책들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다.”p.21
푸코는 ‘문헌학자’ 니체의 ‘학생’이었다.

>푸코, 베를린의 한 강연에서 1978.
“박식의 전문적 영역이나 보통 사람들의 하찮은 앎 속에는 똑같이 전투에 대한 기억이 바닥에 깔려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통제되었던 기억이다. 이렇게 해서 소위 계보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 아니 차라리 수많은 계보학적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형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투쟁의 정확한 재발견이며, 동시에 전투의 생생한 기억이다.”p.25
“진정한 지식의 이름으로, 또는 몇몇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는 과학의 권리를 내세워 국부적인 앎에 침투하고, 거기에 위계질서를 세우고, 그것들을 정돈하려는 통일적 이론의 심급에 대항하여 국부적이고 불연속적이며 폄하되고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앎들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니까 계보학은 좀더 주의 깊고 좀더 정확한 과학의 형태로 돌아가려는 실증주의적 기도가 아니다. 계보학은 엄밀히 말하자면 반(反)과학이다.”p.26
온갖 제도는 전투의 산물인 동시에, 그것 자체로 하나의 전투이다. 계보학을 통해 소환될 전투의 기억은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서 있는 기성제도의 기원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 위계질서란, 근대 이후에 있어서는 특히, '과학' 또는 '합리'라는 각진 고깔을 쓰고 무대 위에 나타났다. 과학은 순일무잡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을 보좌하고 행사하며, 기실 그것 자체로 하나의 권력으로 군림했다. 과학이라는 심급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앎도 신뢰할 만한 것, 유용한 것, 가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계보학은 과학의 미명을 과감히 사양한다.

“마르크시즘이나 정신분석학이 그 구성법칙이나 사용된 개념, 또는 일상적 전개 안에서 과학적 실천과 유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시하기 전에, 그리고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담론과의 구조적, 형식적 유사성의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우선 과학이라는 주장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 야망을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과학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유형의 앎의 자격을 박탈하려 하는가? 당신이 ‘이 담론을 말하는 나는 과학적인 담론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학자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나 어떤 담론의 주체, 즉 어떤 경험과 앎의 주체를 소수파로 만들고 싶어하는가?”p.27나는 이러한 내용의 논거로 정신분석학을 비 과학이라 비판한 최재천을 반박한 바 있다.
“그런 식으로 계보학의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부각시키고 그것들을 유통시킨 순간부터 이 요소들은 그 통합적 담론들에 의해 다시 코드화되고, 다시 식민상태로 떨어질 위험은 없을까?…우리가 이처럼 되살려낸 단편들을 보호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우리식의 통합적 담론을 하나 구축할 위험은 없는가?”p.29
자기부정, 자기부인, 자기배반,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니체와 푸코의 사도인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 지녀야할 덕목일 것.
한편 우리는 니체가 ‘선’과 ‘도덕’에 대해, 그리고 푸코가 과학에 대해 권력화와 가치편향성을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법’에 대해서도 유사한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법은 권력의 양도가능성을 제멋대로 ‘상상’했던 이상주의적 사회계약론자들의 올가미에 묶여 있다. 푸코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권력의 고전적, 사법적 이론에서는 권력이 마치 재산처럼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고, 따라서 사법적 행위 또는 인도나 계약의 형식인 권리 개설의 행위에 의해…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남에게 이양하거나 양도할 수도 있는 하나의 권리로 간주되었다….”p.31
“…권력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우리는 현재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재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사된다는 것, 그리고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p.33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대 서구철학의 주체비판은 권력담론 내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권력)주체는 허구다. (권위적)인간은 (권력)행위로서만 존재한다.
신의 시선을 대변하는 고딕양식이, 근대 코기토 철학의 주체론적 사고방식에 여과되면서 인간의 시선을 대변하는 바로크양식으로 이행되었다면, 오늘날은 주체관념과 지향성으로서의 인간의식이 붕괴되면서 전혀 새로운 문화양식이 도래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의 손에 쥐어졌던 왕홀은 보기 흉하리만큼 낡아버렸고, 그에 따라서 인식론은 자연과학에 자리를 내줘야 했으며, 신과 인간이 최상층을 차지했던 존재계열의 피라미드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수직적 모형을 상정했던 권력담론의 패러다임은 푸코에 의해 거미줄처럼 편재된 권력모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다.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력관계는 근본적으로 정확히 어느 역사적 시점의 전쟁 안에서, 또는 전쟁에 의해 확립된 특정의 힘의 관계를 그 정박 지점으로 삼고 있다.…정치란 전쟁 안에서 노정된 힘의 불균형의 연장이며 제재이다.…평화와 그 제도에 관한 역사를 쓸 때라도 사람들은 결국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p.34
2008. 6. 6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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