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근대적 시공간의 탄생』(푸른숲)을 일부 읽다.“새로운 공간을 생산하지 못한 혁명은 그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혁명은 삶 그 자체를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나 제도, 정치적 장치를 변혁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 사회적 변환은 그것이 일상생활이나 언어, 공간에 미치는 효과에서 창조적인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 충격이 각각의 영역에서 동일한 비율, 동일한 속도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말이다.” Leffebvre, La production de l'e space, 이진경, p.35 재인용
“그것(근대적 시간)은 선분화하는 것이 선분화된 단위시간에 정해진 동작을 표준화된 형태로 대응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와 이질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없애는 방식의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근대적 리토르넬로(retornello), 근대적 시간성은 이전과 달리 사람들마다 갖고 있는 삶의 고유성과 이질성을 허용하지 않는 삶의 리듬을 강요―정말로 그것은 강요이다―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61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현존에 있어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대, 특정한 이념 하에 놓인 인간은 그것들과 더불어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 하에 놓이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특정 시간과 공간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다종다양한 삶의 양태를 날것으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혹은 그러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진 산물이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혹은 어느 계급이나 집단에 의해 조작, 가공, 제한, 억압, 은폐, 재생산해 왔다는(또는 그러한 산물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시공간은 하나의 권력인 동시에, 그 권력의 작동방식이며, 그 권력의 담지자였다.
근대적 권력, 그것은 삶의 차이와 다양성, 이질성을 훼손하고 파쇄하는 전략의 수단으로서 공간과 시간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왔다. 개인은 이 속에서 자율성과 자존감을 상실한다. 개인의 존재론적 위상은 시대라는 기계에 매달린 나사조각으로 전락한다. 저자가 은유적으로 주장하고 있듯이, 한 시대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라야 가질 수 있는 '상대적 속도'가 아닌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통해 갖게 될 '절대적 속도' 로써, 시공을 지배하고 장악함에서 오는 '느림'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독수리의 여유로운 비행은 커다란 날개와 멀리 보는 시야를 필요로 하는 일일 터이다. 그것들을 갖기 위해 각자는 얼마만큼의 노고를 견뎌야 할 것인가? 시대의 중력을 비웃으며, 공중 높은 곳을 떠다니면서도 생존을 위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역량을 갖기 위해, 우리 학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요청해야할 것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2008. 5. 28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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