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철저히 의식적이고자 했던 삶과 죽음 苦讀과 孤獨

1. 저녁에 계획된 스터디가 취소되어 생긴 호기회는 전혜린의 평전을 읽는데 바쳐졌다. 삶에의 환멸과 애착, 철저히 의식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추구와 그에 대한 숱한 좌절에서 겪는 자기멸시, 비범함과 평범함 사이에서 반복되는 어지러운 줄타기, 고독한 고뇌와 열띤 수다, 이러한 자기모순의 기암괴석들 사이로 그녀의 잔뜩 긴장된 언어의 고기떼가 펜촉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린다. “후회의 극치까지를 행위로 규명해보고 싶다.”고 절규하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권태의 창자 속에서 안온히 누워 자길 바라는 나의 혼을 사정없이 일깨웠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와 섬광 같은 검은 눈동자, 치렁치렁한 검은 차림새와 깨알 같이 검은 글씨들, 검음의 미학을 사랑했던 그녀의 사려로부터 나는 얼마나 거센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 (Taoist라고 할 수 있는 내게 검음玄의 의미는 사뭇 남다르다.)

 그녀처럼 생각하고, 그녀처럼 느끼고, 그녀처럼 쓰고, 그녀처럼 사랑하고 또 멸시하고 싶다. 그것이 자기파멸의 욕동을 끊임없이 야기하는 사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것일지라도. 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이처럼 거대한 존경심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니! 그녀의 삶과 언어 앞에서 나는 수컷의 자존감조차도 부지하기 힘겨울 정도다.


2. 인상적인 몇몇 구절을 적어본다. 밑줄은 나의 임의로 그은 것.

“나는 그녀가 쏟아내는 말의 격류 속에서 ‘권태’와 ‘광기’란 두 낱말이 너무도 자주 등장하는 걸 의식했다. 그녀의 마치 정적을 무서워라도 하는 것 같은 저 다변(多辯)의 의미를 나는 훨씬 뒷날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어째서 그처럼 격렬하게, 마치 항거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그녀가 이룩하는 온갖 시선과 몸짓은 공허를 충만으로 바꾸기 위한 의식적인 항거였다는 것을. 대화는 언제나 그녀를 구출했던 것이다. 일상성의 피로로부터, 고독으로부터, 권태와 공허로부터, 또한 죽음의 공포로부터….”(p.51~52)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관대했다. 그녀는 남 앞에서 결코 심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자신이 참을 수 없이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도. 그렇듯 철저히 비타협적인 정신, 온갖 즉자적인 존재를 참지 못하는 날카로운 의식에 대한 이 얼마나 모순된 태도랴. 바로 그러한 모순 때문에 본인은 뼈를 저미는 내적 갈등과 치열한 의식투쟁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p.66)

“이론은 삶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고 생명은 정녕코 관념보다 강하다.”(p.101)

삶에 대한 작가의 심찰을 보여주는 일구였다. 아래는 작가가 소개한 전혜린의 일기의 일부.

“나르시스가 죽은 뒤의 님프들처럼 당신이 없음을, 없는 존재세계의 무와 무목적성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풀고 울며 외친다. 우리는(신이여! 신이여!) 심연에서부터 신이여―우리를 이 뼈를 깎는 공포로부터 놓여나게 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여!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옛날에 기절했을 것입니다.”(p.105, 1961. 1. 7 작성된 일기)

 나의 ‘죽음에의 의지’는 신앙이 아니었다면 진작 충분히 시도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온갖 이론과 염세적 피식거림으로 꽉 들어찬 내 안에도 여전히 죽음에의 의지를 돌파할 신에의 의지는 소중히 잔존한다. 이것이야말로 나와 나의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튼실한 고리라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모든 전달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만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일까? 만남의 짧은 매혹 끝에는 기나긴 상처의 길밖에 남겨져 있지 않음에도 왜 인간은 만남에 황홀하는 것일까? 인간은 거의 만남에 의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불가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언제나 가능한 것은 고백뿐이다. 대화의 메아리는 언제나 독백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언제나 ‘너’를 찾으려던 우리들의 시도는 ‘나’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고독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무섭게 어두워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몹시도 목말라 있다. 한 개의 자매혼에, 이해하는 마음과 눈에 그것은 떨고 있는 것이다.”(p.132, 1961. 1. 10 작성된 일기)

 사랑에 대한 전혜린의 위의 통찰은 허무하고 신랄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그것은 자신을 탈탈 털어내고 살해하고 또 소각해버릴 정도로 진정 무섭게 사랑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고백’은 늘 차폐된 울림, 고독한 메아리에 불과할 따름이며, ‘너’를 찾는 시도는 늘 ‘나’를 ‘다시’ 찾는 일로 귀결되곤 한다. 아, 나는 얼마나 더 나를 찾아야 너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허허롭지만 결코 멈춰질 수 없기에 다가올 때마다 나의 영혼을 공포에 울게 하는 그러한 시도가 아니던가? 

2008. 4. 2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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