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김영민이 자기 자신과 이 사회에 대해 골몰했던 흔적들은 당시의 책들 속에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그가 단지 그의 비판 대상이었던 우리 사회의 학인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도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어떤 각오(覺悟)의 회오리가 그의 속내를 휘저어 놓았던 것일까? 그는 어떤 결정적 연유로 인해 그의 특출한 장기(長技)였던 ‘실존철학과 관념운용법’을 집어던지고, 이 땅의 구체적 삶과 현실에 눈을 돌렸던 것일까? 그와 대면한 적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와 같은 학인을 갖게 된 우리로서는 만면에 다행스런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지식인과 심층근대화』에서 살피고 있는 내용은 바로 앞전에 읽은 『진리,일리,무리』와 대동소이하나, 근본적인 주제의식은 상이하다. 『진리,일리,무리』가 인문학 위기의 실체와 해결에 주안했다면, 『지식인과 심층근대화』는 ‘졸속근대화’와 ‘서구 종속’으로 대별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제시에 주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주제의식은 하나의 낚싯줄에 걸린 두 마리의 물고기에 다름 아니다. 『진리,일리,무리』보다 나중에 쓰여진 이 책은 상당 부분 『진리,일리,무리』의 표현과 논의를 재소환하고 있어 소소한 지루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6,70년대를 수놓았던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일단의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김영민의 표현대로 그것을 ‘졸속’인 것으로, 또한 그것의 달성을 가능케 한 사회 이데올로기를 ‘졸부주의’로 치부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가난’이라는 잔뜩 주름지고 헐어빠진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부’라는 말쑥한 새 옷으로 환복(換服)한 경사(慶事)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중첩된 논란의 와류(渦流) 속에 잠겨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양(量)으로 환원하는 근대 과학적 안구로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발전이요,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매사를 조심스레 건드려보고 흔들어보기 좋아하는 인문학자의 거울에 비춰본다면, 그것은 겉보기의 화려함과는 달리 부실하고 연약한 건축물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을 우울하게 수놓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는 부실한 근대의 상징물이었고, 90년대 말을 뒤흔든 IMF 금융위기는 졸속 경제주의의 보잘것없는 소출(所出)이었다.
허나 그것들은 근대 한국인들을 경각시켰고 충분한 주의를 준 것 아닐까? 한국경제는 다시금 비상하고 있고, 10년 전과 비교하여 전체적인 부와 국가적 역량은 크게 성장했다. 여전히 주요 암 발생률, 교통사고, 음주운전사고율, 낙태율 등의 통계 치에서 세계 수위를 질주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현상들은 ‘풍요’의 조짐은 아닐까? 의학적 발전은 수위의 암 발생률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높은 교통사고율은 ‘다들 차 한 대씩은 굴릴만한’ 서민경제의 넉넉함을 방증하는 듯하다. 그리고 문란한 음주문화와 성문화는 부단한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갈구해야 하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비참함을 잊게 해주는 신비의 음료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렇듯 ‘사회악’으로 여겨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실제로는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사회적 아우라를 반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높은 산일수록 골이 깊은 법…. 가파른 상승로는 깎아 지르는 절벽을 예비하는 이치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실로 기적적인 스테미너로 경사진 악산(嶽山)의 정상을 향해 질주하여왔지만, 그간에 온갖 돌부리와 삐져나온 나뭇가지들로 얻은 살갗위의 생채기들을 돌보는데 소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질주의 의욕은 아름답고 고무적인 것임에 틀림없으며, 자신을 미처 돌볼 틈도 없이 몰아 부치는 그 저돌성 또한 감탄스러운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아직 우리의 목전에는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야 할 험경(險境)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으며, 그것들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잠간의 휴식과 치료가 필요하다. 우리 몸 구석구석을 살펴가며 아픈 곳을 주무르고 소독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급한 지혈도 요청된다. 그러한 쉬어 가는 자세가 우선시되지 않고서는 그간 우리가 분출해왔던 놀랄만한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IMF의 긴급 조력은 그야말로 꿰매야 할 상처 위에 반창고 하나를 붙인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생에의 의욕이 충일한 우리 국민들은 십 년이라는 시간을 내달리며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쳐왔다. 그러나 우리는 향후 100년, 1000년, 그리고 그 이상을 생존하며 이웃과 경쟁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어느 한적한 개울가에 앉아 좀 더 크게 심호흡하고 주위의 풍광을 향해 감각을 열어 애무하며 자신의 상흔들을 보다 관심 있고 조심스럽게 치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 어쩌면, 우리가 목표한 정상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부단한 질주 때문에 놓쳐버리는 우를 범했던 것은 아닌지 숙려할 필요는 없을까?
‘서구 추수(追隨)’에 대한 김영민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우리는 보다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 볼 일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주위의 어떤 것도 서구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전근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보다 현대 서구인들과 더욱 커다란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리에는 공맹의 사서오경이 절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서양철학의 사유물들보다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혹자는 서구적인 것을 배타(排他)하고 동양적인 것을 복원할 것을 주장하고, 혹자는 동양적인 것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세계화에 발맞춰 서구 문화를 옹호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더러는 서구든 동양이든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발근(拔根)해야 함을 주장하거나, 아예 어떤 것이든 일단 수용하는 일이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강변한다.
이러한 논변들 속에서 김영민이 추구하는 바는 주체적, 창발적 수용이다. 물론 이것은 누구에게나 강요되는 태도는 아니다. 서구사상이나 문화에 정통한 학자도 필요하고, 동양적인 것이나 우리 고유의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정통한 학자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분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학인들에게 그것들을 이 땅에 거주하는 우리의 삶에 부합하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사상과 학문으로 엮어내기 위한 노력들이 크게 요구되고 또 그러한 노력들을 정당하게 ‘기록/평가하는’ 사회적, 제도적 노력이 절실하다는 점에 있다. 그간 우리 학계는 우리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폄하하는 행태를 취해 왔는데, 그것은 수많은 각주들과 참고문헌 속에 과연 이 땅의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가의 문제제기에서 여실하게 입증된다. 수많은 외국문헌들로 참고문헌을 도배하는 일을 영예로 인식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여전히 학계를 주름잡고 있지 않은가?
칸트적 의미의 계몽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지니는 것, 그리고 ‘자유가 강요하는 바를 견디는 것’이라면, 이 땅의 학인들은 여전히 미몽에 빠져있는 것 아닐까? 타자의 오성과 타자의 강요로 여기까지 달려온 우리들에게 앞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각자 자기 자신들을 계몽하는 일, 그리고 이 사회를 계몽시키는 일이 아닐까? 인간 개인에게 바람직한 삶이 목표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삶이기보다는 목표를 자신에게 이끌어 오는 것이라고 본다면, 한 사회나 국가적 측면에 있어서도, 타자의 이상에 자기를 성급히 매진하는 것 보다는 자기를 주의 깊게 성찰함으로써 자신에게 걸맞은 이상을 불러들이는 일이 보다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만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만의 사상을 가다듬는 일이란 필수불가결한 일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논지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2006. 11. 22
粗髥散筆.
태그 : 김영민



덧글
nabi 2009/09/16 17:54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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