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담론은 비단 어제오늘일은 아니다. 이 책이 쓰여진 10년 전에도 우리 인문학자들은 목 터져라 인문학의 위기 내지는 사망을 외쳐댔다. 현실은 지금도 매일반이다. 내가 매주 구독하는 『교수신문』은 ‘대학정론’이라는 일면 박스형 기사 란에 거의 빠짐없이 인문학 위기를 거론하고 있다. 10년 전에 김영민이 부르짖었던 인문학 재건의 슬로건은 지금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가! 과연 인문학 재건의 기미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나 김영민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인문학의 위기가 우리 사회와 인문학자들이 처한 몇 가지 중요한 정황과 문제점들 속에서 유발되었다고 본다. 그 정황이란 곧 주체적, 자생적 근대화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과 자본주의가 급속히 팽창했다는 것이고, 그 문제점이란 삶과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관념적, 형이상학적 공론과 졸부주의이다. 인문학이 단지 그네들끼리의 언어유희에나 탐닉하는 머리통만 커다란 무능아 취급을 받았던 이면에는, 특수한 역사적 처지에 놓인 인간의 구체적 삶을 읽어내고 지도하는데 어두웠던 우리 인문학의 오류가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이다. 즉 과람(過濫)한 ‘서구 추수(追隨)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터에서 일궈온,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직결된 우리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 냉담했고 그것을 ‘죽은 개(마르크스)’취급했던 반면, 채 씹지도 않은 서구 사조라는 음식물을 위장에 채워 넣기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우리의 체질에 부합하는 것인지, 혹은 너무 과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졸부근성에 물든 한국인들은 ‘천천히 읽는 법을 알(니체)’ 때 보다 소용이 분명해지는 인문학의 에두른 덕담을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구르는 돌에 이끼 낄 새 없다.’는 프로테스탄트적 언명이다. 그들이 볼 때, 늘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인문학은 아둔하고 답답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문학자이든, 그들을 냉소하는 대중들이든, 둘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났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리고 저자가 원하는 인문학은 우선 그 ‘권리원천’의 뿌리를 삶에 단단히 박아두고 있는 인문학이다. 그리고 근대 절대주의(진리)적 선언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회의주의(무리)적 잠언 사이에서 제3의 길을 향해 행장을 꾸리는 ‘일리(一理)’의 ‘묘(妙)’를 추구하는 인문학이다. 그는 지루하리만치 누차에 걸쳐 위의 주장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견 중언부언으로 비쳐질 수 있겠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고 처리되어야 할 문제들인 것이다.
그가 근대성과 현대성 모두에 취하고 있는 양비론적 몸짓의 근거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세계기계론’의 뉴턴이나 ‘인간기계론’의 라 메트리(La Mettrie)로부터 드러나는 근대 기하학적, 기계론적 진리관은 너무도 단순하고 추상적이어서, 무변광대하고 수 만 갈래의 우연성과 복잡성으로 얽혀진 세계와 인간의 꼴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뉴턴 과학을 향해 몰락의 경종을 울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세계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며 현대 물리학에 있어 하이젠베르크 또한 과학적 한계가 엄존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연주하는 허무와 회의의 이중주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성이 보여주는 일종의 ‘패턴’이나 ‘결’을 도외시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어서 인간과 세계를 손바닥 위에 공히 쪼개 놓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대로 모종의 방향성을 탐지하고 해명하는 나침의(羅針儀)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정묘할 수는 없을 지라도, 적어도 그것의 윤곽이나 실루엣은 그려낼 수 있는 그림붓이다.
저자가 바라는 인문학은 바로 절대와 상대의 상호긴장 속에서 모종의 결을 만들어내는 인문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화라는 창구를 통해서 달성된다. 물론 독서 또한 저자와 독자 간의 긴장어린 대화의 장이 될 수 있지만, 저자는 ‘면접(面接)적’ 대화를 보다 중시한다. 그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대의 고압적이고 찐득찐득한 시선을 배겨내는 결단적 행위이다. 그것은 늘 긴장을 수반하지만, 타자와 나 사이의 묘한 긴장 속에서 성숙을 유도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문학이 본래 지향하는 ‘인문(人紋)’의 탐구를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근래의 인문학자들의 허위의식은 ‘앎의 권리원천이 삶’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도외시하거나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저자는 일갈하고 있다. 그들의 상아탑은 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고, 의미도, 내용도 혼잡하기 그지없는 추상적 사유에 능란하다. 또 그들은 자신의 터가 아닌 이웃집 부자들의 잔치에 기웃거림으로 부산을 떤다. 그들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삶에 착근된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앎이 아닌, 외국의 원전에 대한 무미건조한 해석과 그러한 해석적 글쓰기로서의 논문 양산의 비전(秘傳)이다. 우리 사회의 인문 지식인 집단의 행태가 위와 같기에, 우리 인문학은 우리 자신의 삶에 아무런 유착 없이 공소(空疎)한 입담만을 일삼게 되어 결국 대중들의 소외에 떠밀리고 만 것이다.
인문학의 문제가 그와 같다면, 우리 인문학자들의 할 일은 비교적 분명하다. 일단 지적 탐식을 버릴 일이다.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지적했던, 소유양식으로서의 학적 욕구는 과감히 근절되어야 한다. 부단히 ‘나’와 ‘우리 사회’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삶이 지닌 고유성과 특수성을 면밀히 쓰다듬는 자세가 수반되지 않아서는 곤란하다. 이미 급속한 양적 팽창을 겪어온 우리의 근대체제 하에서 뿌리 깊게 서식해온 대중들의 졸부근성은 물론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문학의 위기담론의 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인문학자들의 선각(先覺) 없이는 그 해결이 요원해 보인다. 우리 인문학자들은 인문학 위기를 ‘국가적 지원의 계기’나, ‘국민적 각성의 기회’로 삼기 이전에 자신들에 대한 심도 있는 자성의 조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06. 11. 6
粗髥散筆.
태그 : 김영민



덧글
nabi 2009/09/16 17:56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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