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讀書후 甘想

 니체의 말대로 그의 저서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지위에 놓여 있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짜라투스트라』)는 비록 소설의 구성요소인 ‘인물’과 ‘서사’가 동원되고 있으며, 시의 특징인 고도의 함축성을 품고 있지만, 엄연히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철학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문학작품만으로 대하려는 독자는, 그의 현란한 언어의 강물을 헤엄치다 중도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까다로운 문체를 감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의 사상의 달콤함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는『짜라투스트라』안의 니체의 사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는가? 단지 대강만 붙잡을 수 있었을 뿐이다. 문학과 철학을 접목한 니체의 시도는 그 유례를 끄집어낼 수 없는 대작을 완성하였지만, 나는 본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시종 문학적 수사에 가려진 철학적 명료함이 다소 못마땅했다. 물론 이러한 서평은 그의 문체나 사상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어리석음의 자위적 푸념일 따름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주인공인 짜라투스트라는 철학자라기보다 예언가, 종교 창시자―그러나 이 종교에는 신이 없다―또는 선지자이다. 그의 말들에는 논증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잠언의 형식을 빌려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힘이 느껴진다. 그의 잠언들은 나의 삶과 우리 사회의 내밀한 부분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천 개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하도 방대하고 다양하며 심오하여, 이곳에서 그것들을 열거하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다. 게다가 어떠한 사상을 이리저리 조립하고 짜 맞추려는 시도들을 경계한 그이기에, 그러한 작업을 이 글에서 실행하기란 부끄러운 일이다. 짜라투스트라를 다소나마 경험한 내가 지금 이 글로써 해야 할 일은 그의 사상 속에서 내 것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사유로 재건하는 일이다. 

 나는 니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도출한다. 첫 번째로는 현대 사회의 몇 몇 문제들을 해결할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루소적 사회관과 니체적 사회관 가운데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할 것인지, 또는 양자를 혼합하여 제3의 이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루소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을 동정어린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의 사상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것들이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수성을 지녔다는 점만으로 그것들의 생명이 존엄한 것임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전제로부터 그는 인신의 속박과 생명의 부당한 탈취가 어떠한 경우라도 부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이 생존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와 생성의 의지를 갖고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초월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니체는 초인 혹은 상승의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대중들을 구별하며, 후자는 그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다. 물론『짜라투스트라』의 주인공 역시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인간들의 우둔함과 파렴치함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지만, 어디까지는 그러한 성격은 짜라투스트라에게는 배제되어야 할 것들이며, 초극해야 할 것들이다. 

 이 두 사상의 상이점은 ‘권력’과 ‘민중’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일련의 고민을 안겨준다. 루소가 제시한 ‘일반의지’에 의한 의사결정은 비록 과정의 합리성은 인정받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리석은 민중들의 감정적 구호와 선동에 의해 흐려질 경우, 늘 사회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될 바람직한 결과물의 도출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위험스러운 것이다. 반면 니체의 권력이론은 몇 몇 창의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의 영도로써 정책결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을 이끌어내기 용이한 측면이 있으나, 자칫 20세기 초의 나치즘과 파시즘과 유사한 폐단을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다. 또한 전쟁이나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니체 사상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두 번째 논제는, 인간 개개인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지도되어야 할 것인지 하는 점이다. 사실『짜라투스트라』에서 엿볼 수 있는 주된 내용상의 초점은 바로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니체에 있어 바람직한 인간상은 바로 초인이다. 사실 니체에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직 진화중인, 원숭이와 초인의 중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이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는 아닐 것이다. 니체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자신의 정신적 진화론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양자를 모호하게 뒤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원숭이 - 인간’의 관계와 ‘인간 - 초인’의 관계는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것인데, 이것을 진화의 일직선상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비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초인의 단계로 초극하는 과정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초인으로 변화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 요구된다. 기존의 도덕관념에 대한 부정, 끝없는 자기기만의 욕구에 대한 부정, 내면의 동정심과 비겁함에 대한 부정, 이와 같은 부정들이 획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열망해야 한다. 그리고 부정된 자기 자신을 대체할 새로운 자기는 ‘웃는 자’, ‘춤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늘 고통스런 자기부정을 감내해야 하고, 그것이 영원히 되풀이 될지라도, 그는 용감하게 그 모든 것들에 맞서고 부단히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초인은 완성이 아닌 또 다른 시작, 더 나은 존재로 건너가기 위한 또 하나의 가교(架橋)인 것이다.

 초인의 특징인 ‘웃음’과 ‘춤’의 본질은 어떤 것일까? 자기 초극의 쾌감, 끊임없이 채워지는 열정의 거침없는 소모, 새로운 인식의 즐거움, 아마도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그것은 일전을 앞둔 전사의 흥분에서 흘러나오는 긴장어린 웃음이고, 승리자의 포효 혹은 패배자의 복수심과 자기재건, 이와 같은 묘한 감정들로부터 빚어져 나오는 것들이리라. 

 니체의 초인사상, 강자의 도덕, 선악 관념에 대한 허위성 고발, 신의 죽음의 선언과 삶의 허무, 이와 같은 니체주의의 내용들은 자칫 세상을 전쟁과 파괴, 혼란의 소용돌이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되어 사람들의 적극적인 평가를 망설이게 할 소지가 있다. 나에게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의 사상이 일면 무시무시한 것으로 여겨지며, 때문에 그의 사상가운데 위험성이 적은 것들만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소심함과 지나친 조심성의 소산이라 할지라도, 또한 내게 니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할만한 충분한 논거가 끝내 마련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그의 사상이 길들지 않은 육식동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비판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의 일면조차도 내게는 위대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니체주의는 실로 엄청난 사상이다. 게다가『짜라투스트라』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게 전달하는 미적 쾌감이란 그 어떤 저자의 작품으로부터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나는 이 책을 극소의 몇 몇 명저와 더불어 평생의 벗으로 삼게 될 것을 예감한다.

2005. 8. 19
粗髥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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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박정아 2008/10/05 12:23 # 삭제 답글

    잘 읽고 갑니다. 생각을 정말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시네요~ 부럽습니다 ^^
  • 조염 2008/10/05 13:24 #

    방문 감사합니다. '논리정연'이라니, 제게는 너무나 멀고 먼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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